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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다잉 특별 기고> '죽음(Death)' & '삶(Life)'

송계순 부천웰다잉 문화연구원장

장상옥 | 기사입력 2023/02/18 [10:39]

<웰다잉 특별 기고> '죽음(Death)' & '삶(Life)'

송계순 부천웰다잉 문화연구원장

장상옥 | 입력 : 2023/02/18 [10:39]

▲ 송계순 부천웰다잉문화연구원장   

 

 

다음 몇 가지 명언을 반복하여 한번 읽어봅니다. 그러면 누구나 다 맞이할 죽음에 대하여 좀 더 알게 될 것이다. 어떻습니까? 모든 일은 준비(準備)하고 사는 것이 상책(上策)이 아니든가요? 아시는 바대로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自明하게 아는 것이 다섯 가지다. ① 누구나 죽는다. ② 순서가 없다. ③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④ 대신할 수 없다. ⑤ 경험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 톨스토이/러시아의 소설가, 사상가가 한 말이다. (1828~1910)  그런가 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아니 사람들은 죽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마치 그것을 알지 못하는 듯 미친 듯이 산다.“ 리챠드 박스터/미국의 신학자의 말이다. 

 

또한 ”죽음은 사람을 슬프게 한다. 삶의 3분의 1을 잠으로 보내면서도,,,“ 바이런/영국의 낭만파 시인이 한 말 입니다. (1788~1824) ”죽은 자를 위해 울지 말라. 그는 휴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 오듯이 잘 산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레오 나르도 다빈치가 한 말이다. (1452.4.15~1519.5.2 이탈리아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그런가 하면 세게적 베스트 셀러인 성경에서 "Death(죽음)"은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태어난 '셋'이 장성한 뒤 아들을 낳자 ‘에노스'라 이름을 지은 때로부터 인간들이 비로소 창조자(여호와)의 이름을 자발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그 때 부터였을까? (창4:25~26) 

 

어떠한가? 모든 사람의 경우 자식의 이름은 그 이름을 지어 주는 부모의 뜻인 경우가 많다. 여기 '에노스'의 의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란 뜻이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 분명하게 창조자께서는 "Death(죽음)"을 예고했다. (창3:19) 

 

그렇지만 인간은 그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죽음이란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성경 상 이어지는 '셋' 시대에 비로소 자신이 '에노스'인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통감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의 "Death(죽음)"을 자각한 이후로 '죽었더라,' 는 단어가 무려 8번이나 기록이 되어 '죽음의 족보'가 되었음을 본다. 

 

자신의 죽음을 통감한 인간 그제야 창조자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 들였고 비로소 말씀을 좇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에노스'임을 자각한 이상 생명의 근원 이외에는 자기 ’죽음(Death)‘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메시지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에노스'인 즉 ‘자신의 “죽음(Death)"을 인식한 자’ 만이 창조자를 인격적으로 만나 "산다(Life)"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자에 의한 인간임을 알면서도 창조자를 귀로만 들을 뿐 삶으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유는? 우리 자신이 '에노스'임을 절감하지 못한 채 세상 속에 빠져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가?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생'(生)인 즉 '사는 것(Life)'이 우선이다. 그래서 '생사(生死) 확인', '생사기로(生死岐路)' '생사고락(生死苦樂)' '생사가 걸린 문제' 등의 술어의 예(例)에서 보듯 일차적인 관심이 먼저 '생(生)'이기에 '사(死)'인 즉 ‘죽음(Death)’은 항상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 바쁘게 살고 있지만 실은 의미 없이 죽어 가고 있는 삶이다. “죽음(Death)”이 배제된 삶의 토대란 물거품처럼 허망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칠판의 바탕색과 분필의 색이 선명한 대조를 이룰 때만이 칠판 위에 씌어 진 글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처럼 삶은 ‘삶(Life)’과 대조를 이루는 ‘죽음(Death)’과 짝을 이룰 때만이 참된 의미의 생(生)으로 구축해 나아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바른 삶을 영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생사(生死)’의 매듭이 아니라 ‘사생(死生/Death & Life)’의 매듭이라 하겠다. 죽음의 바탕 위에서만이 생(生)은 생(生)으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愚妹)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했다. 그러니까 ‘우매한 자’는 자기 기분과 욕구만을 좇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죽음과 의미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지만 ‘지혜로운 자’는 매일의 하루하루가 자기 죽음의 날일 수 있다는 자각(自覺) 속에서 살아가기에 그 죽음의 바탕 위에서 참된 삶을 추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의 매듭을 바르게 맺어야 그 매듭을 발판 삼아 참된 의미의 생(生)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가? 곧게 잘 자라는 대나무의 자라는 것을 보면 대나무는 매듭 위에 새로운 줄기가 자라 성장을 한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8) Coram Deo! /오직 하나님! Amen! Maranatha!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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