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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칼럼> 감추고 싶은 별명

김 덕 중 시니어 기자

장상옥 | 기사입력 2024/06/18 [09:16]

<시니어 칼럼> 감추고 싶은 별명

김 덕 중 시니어 기자

장상옥 | 입력 : 2024/06/18 [09:16]

 

▲ 김덕중 기자    

 

 

 

  보통 친구라 하면 친밀하게 자주 만나는 사람을 일컫는다. 만남이 뜸해지면 사이가 멀어지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강산이 다섯 번 반이나 바뀌는 동안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던 게 초등학교 동창회다. 초등학교 친구들의 만남을 숙명이라 생각하고 체념했다. 이런 내가 칠순에 이르러 코흘리개 벗들과 재회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친구 S의 연락이 인연의 고리를 연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해 3월, 낯선 전화가 와서 받지 않았다. 그랬더니 바로 문자가 왔다. “S입니다. L 선배님 전화번호 찍어 주세요.” 깜짝 놀랐다. S는 초등학교 동기생으로 졸업 후 만난 적이 없지만, 간간이 근황을 들어왔던 옆 동네에 살았던 죽마고우다. “친구, 오랜만이요. 잘 있지요?” 문자를 보내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려 56년 만에 이뤄진 대화였다. 오랜 세월 속에 묻혔던 그리움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 때는 반가움과 궁금함이 뒤엉겨 있었다. 그런데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고, L 선배의 전화번호를 왜 묻는 것일까? S 친구가 나에게 연락한 이유가 궁금했다. 

 

  내게 문자를 보내고 통화를 할 때 S는 수원에서 변호사로 개업 중인 H 선배와 동석 중이었다. H와 L은 고향에 있는 O고교 1회 졸업동기생으로서 내 사립 중학 시절 교정(校庭)에서 함께했던 고교 선배다. 친구 S는 O고교 4회 졸업생으로 3년 후배다. 재학시절 어깨 한 번 스친 적 없으나, 졸업 후 학교를 빛낸 인연으로 서로가 각별했다. H 선배와 S는 일터가 수원이라는 특징이 있고, L 선배와 나는 요즘 글쓰기 공부를 같이하는 공통점이 있다. 넷은 O고교를 매개로 이런저런 인연이 얽히고설킨 선·후배 관계다.

 

  그렇다면 S가 바로 옆에 동석 중인 H를 통해 L 선배 연락처를 바로 알 수 있을 터인데, 나를 통한 이유가 궁금했다. H 선배의 배려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와 S 간에 오랫동안 소통이 없었던 점을 고려한 선사(膳賜)였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듯이’ 선배는 그렇게 아름다운 만남을 예비하고 주선했다. 

 

  선배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만남은 굼떴다. S와 몇 차례 통화를 거쳐 지난 12월 초 ‘재경 O 초등학교 48회 동기회’ 모임에 나갔다. 반백 년이 훌쩍 지난 만남에서 주인공은 나였다. 집 나간 어린이가 반백이 되어 부모 품에 안길 때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S가 동기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스물다섯 명의 회원 중 스물두 명이 참석할 정도로 호응도가 높았다. 80년대 중반 모임 결성된 후 부침을 거듭하다가 안정을 찾기까지는 회장단의 헌신적인 수고와 희생이 컸다. 무엇보다도 기금관리가 남달랐다. 상당한 회비 징수, 넉넉한 애경사비 지출, 투명한 지분 관리는 타의 본이 되었다. 건전한 모임의 장수 비결을 일깨워 준 기분 좋은 하루였다.

 

  내가 처음으로 참석했던 그날 동기회 오찬은 친구 K가 특별히 마련했다. 그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그 어렵던 초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에 여러분께서 십시일반으로 도시락 뚜껑에 한두 숟갈씩 나눠 준 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기억이 선합니다. 그때의 고마운 정을 생각하며 작은 성의로 점심 한 끼 대접하고자 하니 맛있게 드시기를 바랍니다.”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나와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난, 그 시절로 소환되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내가 소속한 6학년 2반 교실엔 몇 개의 책상이 동원되어 식탁이 급조되곤 했다. 7~8명이 무리를 이룬 식탁 테이블에 두 명이 초대받았다. 그때 부급장이었던 나는 단골로, K와 또 다른 친구는 교대로 불려 가 점심을 얻어 먹었다. 좋은 추억은 울림이 오래간다. 그런 추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이 나게 마련이다.

 

  추억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가슴 속에 아픈 추억 한 두 개는 품고 산다. 내가 단골로 신세를 지고 있을 무렵에 별명에 관한 충격적인 얘기를 전해 들었다. 내 별명은 ‘떡중’이었다. ‘덕이 중간에 있어서 떡이 쏟아지는 이름’이라며 호의적인 별명으로 불렸다. 내 별명에 어느 날부터 색다른 해석이 추가되었다. ‘껄떡거린다’ 의미의 떡중이라고 친구들 간에 거론되고 있음을 한 친구의 귀띔을 통해 알았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는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어찌나 창피스러웠던지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한참 동안을 흐느꼈다. 운동장에서의 울부짖음이 사흘 만에 끝났다. 운동장에서의 무언 시위가 어떤 사유로 종료되었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겐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떡중이, 감추고 싶은 별명이 새삼스레 친구 K의 인사말을 통해 소환된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지는 사람이 친구다. 오래 보지 않아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친구다. 친구의 향기는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는 일에 지쳐 어깨가 축 처져 있다가도 친구를 만나면 아연 생기를 얻고 활력이 넘친다. 그런 친구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세상 살 맛이 절로 난다. 법정 스님의 친구에 대한 글이 새삼 울림을 주는 하루였다.

 

  ‘친구여!! 나이가 들면 설치지 말고, 미운 소리, 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소리, 불평일랑 하지를 마소. 알고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적당히 아는 척, 어수룩하소. 그렇게 사는 것이 평안하다오···.

  멍청하면 안 되오. 아프면 안 되오. 그러면 괄시한다오. 아무쪼록 오래오래 살으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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