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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칼럼> 지킬 수 없는 약속

임병량 시니어 기자

장상옥 | 기사입력 2024/09/08 [08:54]

<시니어 칼럼> 지킬 수 없는 약속

임병량 시니어 기자

장상옥 | 입력 : 2024/09/08 [08:54]

 

▲ 임병량 기자     

 

 

  60년대 초등학교 시절은 수업료를 내지 못해 항상 독촉받았다. 출석부가 정리되면 미납자만 불러서 언제까지 가져올 수 있는지 묻는 게 수업 시간 일부다. 어린 나이에 가난으로 겪었던 약속이 생각난다.

 

  약속은 지키자고 맺는 것이지만, 위기 모면이나 압박감으로 날짜를 정하면 거짓말만 키운다. 수업료는 가족과 협의해서 날짜를 정해도 어려운 형편이다. 부모님은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고 오직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산과 들에서 한평생 일했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환경에 언제 가져오겠다고 약속을 할 수 있겠는가. 잔머리를 굴려 약속일 자를 한 달 후로 대답했다. 순간 호흡과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양심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신호를 보낸다. 약속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약속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심란하다. 형편이 어려우니 마음마저 초라해진다. 학교에서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궁리하지만, 뾰쪽한 답이 없다. 부모님은 "다음에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지만, 다음이 언제란 말인가? 더 이상 말을 섞으면 마음만 아프다. 나처럼 빈손으로 등교하면 모두 집으로 돌려보낸다. 집에 가봐야 뻔하다. 가정리 앞 비행장에서 부서진 비행기 날개와 놀면서 탄피를 줍는다. 이곳은 전쟁 후 흔적이 남아 있다. 탄피는 엿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물물 수단이다.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에 돌아가 겉과 속이 다른 내용으로 전한다. 가슴은 한없이 뛰고 있다.

 

  고학년이 될수록 중퇴자가 늘어난다. 이유는 수업료가 없으니 배움을 포기하고 일해야 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퇴하면 농사를 짓거나 도시로 나간다. 도시에 일가친척이 있다면 농사를 피할 수 있으니, 행운아다. 그 시절은 농사가 의식주를 해결하는 중심 산업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은 농업이 기본적인 생업(生業)이라는 뜻이다. 농사란 때에 따라 단비가 필요하고 제반 기후 조건이 맞아야 풍년이 든다. 원시적 농법은 하늘만 쳐다보니 흉년이 길어진다. 인정 많은 아저씨가 삽자루를 들고 물줄기를 찾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학교까지 무료교육이다. 앞으로 고등학교까지 확대한다고 한다. 의무교육은 돈이 없어도 누구나 학교에 다닐 수 있다. 교육을 받지 않으면 학생이나 보호자에게 법적 책임이 부과된다. 국가 이미지의 실추로 이어진다고 해서 불이익을 준다. 수업료가 없어서 초등학교를 중퇴하거나 어렵게 다녔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만 느낀다. 점심은 물로 채우거나 미국에서 원조한 옥수숫가루로 대신했다. 요즘은 고등학교 학생까지 무료 급식제도 다. 아침을 굶은 학생을 위해 주먹밥까지 제공한 지역도 있다. 이만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린 나이에 배고픔을 겪었던 선배 세대들의 피나는 노력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외에서 탄광 광부, 간호사, 중동지역 기반건설 등으로 벌어드린 수입이 국가 경제 ‘종잣돈’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젠 고령자가 되어 사회문제로 회자(膾炙)되고 있다. 노인을 대하는 근본의 효심은 찾을 수 없다. 자식이 부모를 해 하고, 혀를 찰 일들이 자주 뉴스에 등장한다. 노인인구는 해마다 증가하면서 부모 모시는 게 무거운 짐이다. 자녀가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자식과 부모가 함께 노인이 되어간다. 젊은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노인 문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소리만 요란하다.

 

  부모와 자식은 천륜 관계 약속이다. 사람이 지켜야 할 법은 사회적 약속이고, 양심과 도덕은 자신과의 약속이다. 채권 채무가 따른 금전 거래는 약정한 날짜가 그 사람의 신용을 결정한다. 신용사회는 돈이 없어도 카드 한 장이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 돈이 급하게 필요할 때도 신용만 있으면 돈을 빌릴 수 있다. 빌린 돈은 언제까지 갚겠다고 약속한 날짜를 지켜야 신용을 유지할 수 있다. 이게 신용사회의 기반이다. 하지만 신용을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나 약속어음이 부도난 일도 있다. 개인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천재지변이나 IMF 경우는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IMF 때에는 부실 채권 발생 등으로 은행이 없어지거나 합병된 경우를 지켜봤다. 금융거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신용이 추락하고 담보물까지 처분된다. IMF 후 부실 채권이 증가했다. 재무 건전성을 위해 전담 부서를 신설했다. 이곳에서 사랑하는 후배 K와 한 팀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준 기회다. 강산이 몇 번 바뀌었지만, 심성은 옛날 그대로다. 둘이 서울 강남 지역을 거점으로 각 지점의 채권 상각 업무를 수행했다. 재산조사와 구비서류가 합당한지, 채무자와 약속한 내용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약속만 잘 지켜도 채무가 면제되고, 신뢰와 배려가 풍요한 세상을 만든다.

 

  삶은 약속의 연속이다. 스포츠 경기는 약속된 틀에서 경쟁하기에 공평하다. 공평한 사회는 부정부패가 없다. 약속은 교통신호등처럼 잘 지켜야 한다. 지키는 사람이 존경받아야 한다. 핑계는 양심을 속이는 일이다. 거짓말은 할수록 세련되고 진실처럼 포장된다. 가난과 보릿고개 시절을 겪으면서 배고픔보다는 수업 시간에 집으로 돌려보낸 설움이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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