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의 아내는 이제 자식에 대하여 할 바를 다하였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할 말을 다 잃어버렸다. 우리 가족은 함께 출석하는 교회에 목사님과 상담을 했다. 아들의 삶과 죽음을 그리고 아들의 상태에 대하여 어찌할 바를..... 그러나 얻어진 결과는 명답을 찾지 못했을 뿐. 그래서 과연 아들의 코에서 호흡기를 어떻게??? 만일 그때 자신의 죽음과 삶에 대한 분명한 뜻을 밝힐 그 무엇이 있었더라면....
아! 저 원한의 PMD여! 아! 내 평생에 한을 남긴 PMD의 사슬이여! 어찌하여 나의 두 아들의 몸에 그 근육을 그렇게도 꼼짝못하게 아니 달 싹도 못하게 하여 10년 세월을 묶어 진행을 시킨단 말인가. 그들의 육체의 성장은 정상(定常)으로 두어둔 채 말이다. 신장(身長)도 체중도 용모도 어느누구와 비교 나무랄 것 없이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왜 그 기력(氣力)만을 왜? 아니 왜? 그렇게도 꼭꼭 묶었드랬단 말인가?
둘째‘진호’의 PMD와의 투병 생활이다. 첫째‘광호’제형과 세 살 이 작은 동생이다. 나는 제형의 빛과 열을 받아 밤의‘별’같이 빛나 기를 원하여 이름을“진호(辰鎬)”라 했다. 그러나 그도 제 형과 똑같은 고난의 삶으로 힘든 이 세상에 1971년에 태어나 1990.6.7 일 19세로 나의 곁을 떠나 영원한 천국으로 들림 받아 올라갔다. 그와 함께 했던 일이다. 그가‘입’으로 친‘실로폰’의 연주와 온 가족의 노 래 자랑이다.
그의 나이 15세였을 때다. 종로에 있는 관객 수 1층 800여 명 2층 400여 명인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의 자선 음악 회 실로폰 연주(演奏) 공연 때이다. 당시의 사회(司會)는 개그맨 이홍열씨 그리고 연세대 성악가(聲樂家) 교수들의 출연으로 이루어진 자선(慈善) 음악 회에서다. 실로폰 연주를‘진호’가 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주 우연한 한 기회(機會)이었다. 봉사활동을 하는 한 찬양(讚揚) 지도자 젊은이의 방문에 의해서다. 진호가 실로폰 연주의 재능(才能)이 있음을 발견(탁)하게 됨에 따른 것이다.
사실‘실로폰’! 어떠한 악기(樂器) 인가? 손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있어야만 하는 연주이다. 또한 박자의 개념이 분명해야만 하는 연주이다. 그런데‘진호’의 신체적(身體的) 조건은 어떠했던가? 비록 짧은 길이의 실로폰(약 30㎝) 악기이지만 이 악기(樂器)를 연주하려면 건반(鍵盤) 위에 손을 마음대로 움직여야 하는 악기이다. 그런데 하나하나의 건반을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것이나 한쪽 끝에서 한쪽 끝으로 손을 이동하려면 상의에 옷자락 끝부분을 입으로 물어서 옮겨야만 할 수 있는 아주 힘든 악기인데도 손을 입으로 옮기면서 연주의 박자(拍子)를 정확히 맞추는 것이 아닌가!
이렇듯 진호의 연주 실력을 발견 지도하든 선생님은 안타깝게도 멀리 떠나게 되었고 이웃집 청년이 진호를 동생처럼 돌보아 지도함으로 연습을 계속해서 공연에 임하게 된 것이다. 나는 당시에 정말 힘들고 어려운 결단을 내렸고 어렵고 복잡한 이동이요 무대의 출연이었다. 그러나 나는 진호를 위하고 진호와 같은 환우들을 위하여 힘든 결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지금도 계속 유지되고 있는“한국 근육 디스트로피 협회”인 즉 통상명칭으로는“잔디네”란 모임이다.
당시 나의 생각은 협회의 홍보를 위해서 였다.(당시 협회의 직분이 홍보이사) 나는 진호가 탄 휠췌어(실로폰 악기 셑과 함께)를 밀고 무대로 나아갔다. 지도 선생님은 반주할 키타를 등에 지고 진호가 앉아 넘어가지 않도록 바쳐지고 연주할 실로폰을 올려놓을 책성(데스크)을 들고 무대로 나아가 자리를 했다. 자리가 정리된 무대 위를 바라본 공연장은 조용해졌다. 사회자의 싸인을 받은 지도 선생님의 키타 반주가 시작이 되었다. 딩동댕 진호의 실로폰이 울리는 가운데 뒤에선 우리 내외 등 총 4인의 연주와 합창이 흘러갔다.
조용한 가운데 1,200명 관객의 시청(視聽)가운데... “눈으로 사랑을 그리지 말아요. 입술로 사랑을 말하지 말아요. 영원한 사랑을 바라는 사람은 사랑의 진리를 알지요. 참사랑은 가난함도 부요 함도 없어요. 괴로움도 즐거움도 주와 함께 나눠요. 나의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거예요.”
연주와 합창이 끝났다. 1, 2층 1,200명 관객은 누가 소리치지 않았다. 그런데 일제히 기립을 하여 우뢰와 같은 박수로 화답을 해 주었다. 정말 감격과 그리움과 한이 서린 노래이며 상황이었다. 이후에 나는 CBS(기독교 방송)“새롭게 하소서”의 출연하게 되었다.
1990년 4월이다. 큰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둘째와의 투병 생활이 계속될 때이다. 우리 가정의 투병 생활에 소문이 점차로 이웃에 알려지면서다. 담당 PD(탈랜트 이00)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방송실로 안내를 받아 진행을 하면서의 첫 질문이다.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은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아픔이라던데 어떻게?”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 아픔은 진정 겪어 본 사람만이 아는 한(恨)으로 남는 아픔이요 지금까지도 그 아픔은 남아 있어 견딜 수가 없는 때도 있다. 그래서 생각만 하면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 그리고 그때 프로그램 진행 Back Music이다.
이 가사는 진실한 나의 고백이라 하겠다. <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 햇살 가득 안고 활짝 피는 백합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피어나는 꽃 되리라. 오! 하나님! 이 꽃 바쳐 주님 제단 밝히리니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늘 평안 내리 소서 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햇살 가득 안고 자라나는 나무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귀한 재목 되겠어요> <저작권자 ⓒ 경기실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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