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말 환생하는가?
원불교의 2대 교주인 정산의 한 제자가 근대 학문을 배우더니 윤회하는 것을 부정했다.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자 정산은 우리가 윤회한다는 것을 알려면 정(定)의 상태에서 3개월 이상을 있은 다음에나 알 수 있는 일이지 지금과 같은 보통 의식 상태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정(定)이라는 것은 집중하여 정신이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 상태로 3개월씩 있는 것은 보통의 노력이 아니면 안 된다. 이 경지는 수십 년의 명상 수련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니 윤회와 같은 비상(非常)한 교리를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환생은 왜 하는가?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일정한 과제를 안고 태어난다. 이 과제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각각의 영혼이 어떤 사건을 겪든, 또 누구를 만나든 그것은 모두 그의 배움과 발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영역에서 다음 생을 디자인할 때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는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자기 삶을 자기가 자유롭게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한 사람이 한생애에서 겪는 사건은 대부분 자유의지가 아니라 카르마에 따라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생일은 왜 축하해야 하는가? 이 지상에 태어나는 것은 굳이 불교의 교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대단히 고통스러운 체험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들이 생일잔치를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좋은 곳인(?) 영계에 있다가 고통의 바다로 들어온 첫날을 축하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카르마의 입장에서 볼 때 생일은 분명 축하할 만한 날이다. 지상에 태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일정한 과업 혹은 숙제를 갖고 태어난다. 우리는 일생동안 이 숙제를 풀기 위해 지속적으로 수양하면서 자신의 영적인 발달을 꾀해야 한다. 지상에서의 고통은 우리를 연단시키기 때문에 발전의 속도를 빠르게 한다. 우리가 하기 여하에 따라 영계에 있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 카르마란 무엇인가? 카르마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로 ‘(무엇을)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자로‘업’혹은‘업보’로 번역되는데 이것이 불교나 힌두교를 비롯한 인도 종교에서 기본적인 교리다.
카르마 이론(혹은 업보설)을 아주 단순하게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행동과 말과 의도로 하는 모든 일”이 무의식 깊은 곳이나 소위 아카샤(Akasha, 허공 혹은 하늘을 의미)레코드라는 곳에 저장된 상태로 있다가 때가 되면 그에 맞는 결과를 나타나게 하는 것이 업보 설의 대강이다. 우리가 카르마 혹은 업보에 대해 가장 잘못 생각하는 것을 벌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잘못했으니 이런 업보를 받지.” 하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다스칼로스 같은 사람은 명확하게 “인생에 벌이란 없다.”고 주장한다. 존재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벌이 아니라 “경험”뿐이라고 한다. 이는 대단히 탁월한 견해이다. 우주적 조정자 혹은 지성은 카르마라는 법칙을 통해 개개 영혼들이 진화할 수 있도록 다양한 경험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함 경험을 통해 우주의 법칙을 깨달아 간다.
22. 카르마가 운용되는 실제 모습은? 카르마의 속성은 연속성이다. 우주의 질서에 어긋나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은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이번 생에 닦은 것이 다음 생 언젠가는 반드시 발현하게 되는 것은 카르마가 연속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보복적인 면으로도 표현되는 카르마의 반작용성이다. 우주의 원리에 위배되게 행동하면 균형을 잡기 위해 카르마가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을 일으킨다.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일을 겪든 그것은 카르마가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이니 그 의미를 알아내야 한다. 만일 사건의 의미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몇 생을 두고 비슷한 사건이 계속될 터이니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카르마를 벗어나면서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23. 카르마를 대하는 우리의 바른 태도는? 카르마의 발현은 영혼이 자신의 카르마를 짊어질 충분한 힘이 생길 때까지 미루어진다는 것이다. 관련인물을 만나지 못하면 그와 얽힌 카르마는 계속해서 대기상태로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 영혼들은 신체적 유전이나 자신이 풀어야 할 과업을 가지고 지상의 세계를 두리번거린다. 숙제를 가장 잘 풀 수 있는 부모와 환경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리는 왜 전생을 기억하지 못할까? 만일 우리가 전생을 알고 오면 이생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살 수 있을 터인데 왜 전생을 잊어버릴까? 신비가들은 말하기를 전생을 다 알고 오면 흡사 문제를 다 알고 시험장에 가는 것과 같다고 말이다. <저작권자 ⓒ 경기실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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