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우리 곁을 떠난 후 강산이 한번 바뀌었네. 그곳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는가. 경칩을 앞둔 이곳은 아직 바람이 차네. 서울에서도 가끔씩 꽃 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니 봄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네. 동기 모임이 있을 때 마다 자네 얘기를 많이 한다네. 그만큼 자네가 남기고 간 여운이 짙게 남아 있는 것 아니겠나. 오늘은 자네와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하며 그리운 마음을 담아 보내네.
1983년 4월 그토록 바라던 주택은행에 입사하여 나는 충무로의 중부지점으로, 자네는 본점에 발령을 받았지. 동기들 사이에선 자네가 부행장감이라는 말이 회자할 정도로 스펙과 평판이 좋았어. 그만큼 자네는 뭔가 달랐지. 지금 생각하면 이왕이면 행장감이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귀공자 같은 얼굴에 전형적인 외유내강 형이었지. 하지만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단호하였고, 자존심 또한 대단했던 걸로 기억하네. 초창기엔 근무 장소가 달라 우린 서로에 대해 별로 아는 것 없이 바쁘게 살았지. 해마다 인사철이 되면 희망 부점을 적어 내는데, 가장 인기 있는 부서는 외환업무부였지. 수출입과 환전 등 새로운 업무에 대한 호기심과 해외 출장(연수) 기회도 많아 인기가 대단했어.
하지만 선택된 사람만 갈 수 있었네. 동기 중에서는 처음으로 자네가 외환업무부로 발령받았지. 자네를 보면서 나도 기필코 여의도 본점으로 가겠다고 다짐했다네. 홍대 뒤 와우산 산책길에서 보이는 63빌딩은 잡힐 듯 가까운데, 나에겐 멀게만 느껴졌지. 하지만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영어학원에서 공부를 했고, 금융연수원에서 ‘국제금융 과정’도 이수하며 나를 채찍질했다네. 돌이켜보니 참 열심히 살았던 것 같네. 은행간에 치열한 경쟁 속에서 ‘ㅇㅇ 컴퓨터’와 ‘ㅇ우’의 외환을 유치한 실적을 인정받아 외환업무부로 발령을 받았지. 마침내 꿈을 이루었네. 외환업무부가 국제부로 확대 개편됐고, 자네는 본부 다른 부서로 이동하였지. 국제부에 근무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였네. 특히 자본시장 개방에 대비한 업무를 개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어. 그 사이에 과장으로 승진하여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네.
그런데 국제부에서 파생금융상품 사고가 발생하여 금융시장에 큰 파장을 일으켰지. 천운이라고 할까, 다행히도 나는 화를 면했네. 일 년 만에 다시 국제부 차장으로 승진하여 복귀하자 IMF 사태가 터졌지. 구조조정으로 수많은 직원이 직장을 떠나야 했네. 해외에 투자했던 자산이 부실화되어, 상각(손실 처리) 하는 게 일이었네.
그 뒤 자네가 국제부로 다시 발령받아 파생금융상품 사고를 해결하는 임무를 맡았지. 해외 유명 투자회사와 국내 증권회사와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어 이를 해결하느라 고생을 많이 한걸 보았네. 사후 처리를 해야 하는 골치 아픈 일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어. 그때 솔선수범하여 해결사로 나선 사람이 자네였지. 자네는 큰 사건을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업금융점포장으로 발령받아 나갔지.
IMF 후유증이 최고에 달해있던 그 당시엔 어려운 경제 환경 때문에 지점 근무를 꺼리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네.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어. 하루는 부장이 조용히 나를 불러 기업금융점포장으로 나가라는 얘기를 하더구먼. 그 점포는 부실채권이 많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네. 그래서 그 제안을 거절하였네. 그게 인사고과에 결정타가 되었어. 그 당시는 그런 결정을 한 게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인사고과에서 큰 희생을 감수해야 했지. 결국 지점 차장으로 발령이 났네. 본부에서 8년을 근무하고 지점으로 내려왔으니 의욕은 떨어지고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지.
부장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선택에 후회가 들기도 했다네. 그렇게 보니 후회는 항상 한발 늦게 찾아오더구만. 그 무렵 자네가 우리 부부를 강남의 한 식당으로 초대하여 위로를 해주었지. 본인도 부실채권 관리하느라 힘든 시기에 나를 위로해 준 자네를 잊을 수가 없네. 전임점포장이 취급한 부실채권이 점포 실적평가에 반영돼 자네가 후선의 업무추진역으로 밀려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네.
그 와중에도 지점으로 나를 찾아와 점심을 같이하며 용기를 내라고 위로해 주었지. 그 덕에 힘을 얻었다네. 극심한 마음고생으로 검게 탄 자네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 은행을 퇴직한 후 자네는 지방 시중은행에 일자리를 얻어 외환업무 지도를 하고 있을 때였지. 변호사인 고향 친구가 외환 관련 소송에 필요한 도움을 요청했었지. 그때 자네를 추천했고,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네. 자신보다 먼저 상대를 배려하는 자네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하루는 동네 지인 부부와 파주 마장호수 공원 구경을 간 적이 있었네.
서울 근교에 있는 호수공원으로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곳이지. 나무 데크로 잘 닦아 놓은 호수 둘레 길을 걷다가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먹고 있을 때였어. 핸드폰 전화벨 소리가 들렸네. 반가운 자네 목소리였네. 지방에서 현지 직원들과 등산도 하며 잘 지내고 있다고 했지. 어딜 가나 호감 가는 자네이기에 당연하게 여겼네. 내게 “나이 들면 아내밖에 없다. 아내에게 잘 해주라”며 웃던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네. 목소리도 예전처럼 건강하게 들렸고···.
조만간 한번 보자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나. 얼마 후에 자네가 폐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청천병력 같은 소식을 접했네. 그토록 건강하던 자네가 병원 중환자실에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 아직도 살아갈 날이 많은 데 너무나 가슴이 아파 속으로 울음을 삼켜야 했네. 그 후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선후배 직원들이 자네를 안타까워하며 조문을 왔지. 자네 큰 형님은 “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혼자 안으로 삭이고 해결하는 바보 같은 놈”이라면서, “ 그래도 많은 직원이 찾아오는 걸 보니 동생이 인생을 헛되게 살지는 않은 것 같다.”며 슬퍼하시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먹먹했다네.
고향 화순 양지바른 곳에 환한 모습으로 놓여 있던 자네의 영정 사진을 본 게 마지막 모습이었네. 오늘은 기쁘면서도 만감이 교차하는 날이네. 자네 둘째 아들 결혼식이 청담동에서 있었다네. 아들 얼굴에서 자네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아보려고 발걸음을 재촉했지. 환한 얼굴로 하객을 맞이하는 아들을 보았다네. 탤런트처럼 멋지게 잘 성장했더구먼. 자네를 닮은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다네. 큰아들은 대학원에서 중국어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데 큰 키에 듬직한 모습이 보기 좋았네.
한복차림을 한 혼주의 흰 머리카락에서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아쉬움과 그리움이 짙게 배어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네. 하지만 자네는 가고 없어도 자식들은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앞 세대가 가고 나면 다음 세대가 오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 아니던가.
이제 편지를 끝내야겠네. 올해도 변함없이 봄은 오건만 고운 정 남기고 간 자네의 빈자리가 허전하네. 우리 하늘에서 다시 만나는 날, 술 한잔 하며 못다 한 얘기 나누세. 그때까지 평안히 잘 있게. 자네를 좋아했던 두수가.
# 김두수씨 약력 전북 임실 출신, 국립경상대학교 농업경영학과 졸업,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제 석사, 국민은행 지점장 은퇴, 국민은행장 표창 외 다수, 한국국보문학대학원 수필반 수료, 한국국보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공저 『꿈과 열정사이』,『아름다운 도전』 <저작권자 ⓒ 경기실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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