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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낡음과 늙음의 길목에서


편주헌

장상옥 | 기사입력 2024/08/01 [19:06]

<칼럼> 낡음과 늙음의 길목에서


편주헌

장상옥 | 입력 : 2024/08/01 [19:06]

 

▲ 편주헌     

 

 

 

낡으면 늙는 것인가. 비유가 적절치 않다. 늙으면 낡을 것이다. 비교 대상이 부적절하다. 관건은 시간과의 관계인 듯싶다. 생물[生物]이 살아있는 긴 시간을 지나면 낡게 되는 것이 늙음이라면 수긍[首肯]이 될 것이다. 아니 너무 익거나 웃자란 것도 늙음에 가까우리라. 한 걸음 더 내디뎌서 오랜 시간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알고 노련한 경우도 비유적으로는 늙음에 값할 수 있을 것이다.

 

낡음도 시간 앞에 자유롭지 못하다. 오래되어 헐고 허름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져 새롭지 못할 경우에도 낡음에 근접하기 때문이다. 시대가 흐름에 부응[副應]한다면, 그 변화에 값할 수 없을 때 낡음에 해당된다. 도태[淘汰]하거나 생존하기 위한 탈각[脫殼]의 갈림뿐이다.  

 

정치판이 요동치고 있음을 절감한다. 정치가 사회·경제·문화를 섭정[攝政]하고 있어 변화를 막고 있다는 느낌이 가득하다. 사회를 정치가 흔들고, 정치가 경제를 장악하고 문화마저 압박하는 시대는 분명 암울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야를 넘나드는 포스트시대일수록 구분이 필요하다. 정치에 함몰된 사회, 정치를 떠받드는 경제나 문화는 기형적이고 분명 불편하다. 정치의 목적은 단순하고 강고[强固]한 목표일뿐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치 행태는 늙음과 낡음의 병존[竝存]으로 인한 허무와 절망으로의 질주[疾走] 경기와 같아 보인다. 정치가 권력을 갖게 되는 사회는 미망[迷妄]이다. 정치에 추종하는 경제는 파탄[破綻]이고 문화는 박살[撲殺]이다. 그 험악한 곳에 국민이 설 수 있는 자리가 없음은 자명[自鳴]이 높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한국정치다. 불행한 건 백성뿐이다. 

 

권력은 중독성이 깊고 질기다. 마비[痲痹]를 불러오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은 명예와 재물을 한꺼번에 거머쥐는 장점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노력이라는 것이 노략[擄掠]이기 때문이다.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을 마구 잡아가거나 재물을 빼앗아 가는 것만이 노략질이 아닌 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남은 상흔[傷痕]은 치유보다 분노이거나 야합[野合]이다. 생존을 위한 굴종과 굴복의 선택뿐이다. 낡음이 늙음으로 향하는 사회나 문화가 절망인 이유이다.

 

법치를 법치로 다스려야 한다면, 새로운 제도나 시스템의 필요와 개작으로 가능하다는 절망의 희망을 몽상[夢想]해본다. 국회의원이 가장 저주받는 직종이라면 그 재임기간을 법제화해야 한다. 3선이 아니라 당선과 낙선에 관계없이, 지방의원들도 결선을 포함한 세 번의 기회로 출마할 수 없도록 하는 것 말이다. 3선[12년]이면 강산이 바뀌는 긴 시간이다. 욕심과 중독이라면 그래서 더욱 제도화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시대와의 조화와 적응이다. 미국의 대권주자였던 바이든은 늙음과 과욕이 불러온 정치적 참사[慘事]가 아닐까.  

 

정치가 국민의 이름으로 행하는 수많은 폐해를 겪고도 인내하는 건 아픔을 넘어 깊은 국민의 슬픔이다. 슬픔의 그 끝은 도피이고 자피[自疲]를 넘어 포기에 이르는 불치병이 된다. 그 불치병을 이용하는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다. 국민의 이름을 가장한 폭압이다. 늙음을 붙잡을 수 없는 시대에 낡음까지 경험하는 정치 앞에, 국민은 고달픈 여름을 지나느라 다시 비와 불로된 한 시절로 애를 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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