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일상의 생활 속에 축복이다. 그것은 아침에 10분만 일찍 일어나 보자 하루가 내 손 안에 들어올 것이다. 10분만 먼저 출근을 해 보자 업무와 인간관계의 스트레스가 확 나라 갈 것이다. 음식을 10분만 꼭꼭 씹어먹는다. 만병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약속 장소에 10분만 먼저 나가자 주도적 능동적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화를 10분만 가라앉히고 생각한 후 말하자 다툼이 더 좋은 사귐으로 바뀔 수가 있을 것이다.
10분만 하루를 돌아보고 잠자리에 들자 오늘의 기쁨과 보람이 내일로 이어지며 오늘의 실수가 내일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랑과 감사의 메세지를 10분만 보내보자 사랑과 감사의 삶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더 걸어보자 10분만 건강이 새롭게 찾아올 것이다. 잡담과 불필요한 인터넷과 전화를 10분만 줄이자 하루가 여유로운 중에 집중될 것이란다. 이것이 우리네 일상의 생활 속에 10분의 축복이다.
이와 같은 삶에 의한 것이 아닌가! 인문(人文)학을 비롯하여 전 학문 분야를 두루 아우르는 통섭적 지식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분이다. 우리나라의 문화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훌륭한 저서(著書)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지적 즐거움을 맛보게 해 주었다. 날카로운 분석과 성찰(省察)뿐만 아니라 그의 고독한 지식인의 내면이 잘 담긴 글은 문필(文筆)을 업으로 삼거나 준비 중인 사람들에게 필수 교과서적이기도 했다.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최전선에서 힘차고 강력(强力)하게 평생을 살아온 그이가 기독교(基督敎)라는 종교를 받아들였다? 가히 성경의 신약시대(新約時代) 인물 중에 인물인‘사울’이‘바울’된 사건만큼이나 인상적인 소식이었다. 지식인의 내면의 고독(孤獨)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딸에 대한 애틋한 사랑 등과 함께 그의 삶 속의 뜻하지 않은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과정을 담고 있는 그가 바로‘지성에서 영성으로’의 주인공이다.
어떠한가? 모태(母胎) 신앙으로 자신의 의지(意志)와는 상관이 없이 크리스쳔이 된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청소년기에 부족(不足)하지만 감성(感性)과 열정(熱情)으로 신앙에 온몸과 정성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세상적으로 경험할 것 다하고 나서 인생의 후반기에 비로소 모든 것이 허무(虛無)하고 무의미하다 하여 기독교로 귀의(歸意)한 후, 그때까지 자신이 쌓아왔던 경제력이나, 지식 등을 통해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힘쓰는 사례를 물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이 마지막 예(例)에 속하는 무신론자(無神論者)로서, 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삶, 혹은 치열(治熱)하고 의미 있는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이들에게, 그의 행보(行步)는 충격적이면서도 시사(時事)하는 바가 크다.
성경 속에 “왜 하필 ‘다윗’인가? 대답이 될 만한 여러 이유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현세 성이다. 두드러질 정도로 너무도 인간적이다.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서로 싸우고, 그런가 하면 때로는 기도하고, 때로는 사랑을 하며, 죄를 짓는다. 그런가 하면 야만적(野蠻的)인 철기 시대 문화의 도덕과 관습(慣習)의 제한을 받기도 한다. 여덟 명의 아내, 분노하는 그, 빗나가는 그, 마음씨 좋은 그, 춤을 추는 그이다. 사실 우리의 삶 속에 구원(救援)과 거룩을 가져오는 일에 사용할 수 없거나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최대의 유익(有益)을 얻어 내려면, 이 다윗의 이야기 속에 우리의 상상력이 흠뻑 젖어 들게 해야 할 것이다.”
과연 진정한 우리의 삶이란 무엇인가? 어떠한가? 모두가 유기적(有機的)으로, 개인적으로, 구체적(具體的)으로 연결되는 세세한 것들이 현실화(現實化)된 것이다. 이름들과 지문(指紋)들, 거리 이름과 지역 날씨, 저녁 식사용 양, 빗속에 펑크 난 타이어 등,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삶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논술이나 거창한 표현으로 자신을 계시(啓示)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녀들에게 그들이 누구이며 인간으로서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를 일러 줄 때 그리고 친구들에게 우리가 누구이며 인간으로서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는지를 말해 줄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啓示)하신다.
우리가 성경(聖經) 속의“다윗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인간 영혼(靈魂)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인간의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기까지, 인간 됨의 영역(靈域) 전체를 모두 포함하는 하나의 실재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 갖는 경험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의 여러 차원을 이 정도까지 보여 주는 성경 이야기는 없다.”‘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被造物)’이라 했다.
그들 안에는 막 거듭난 사람들이 보여 주는 보편적 특징인, 스스로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자 하는 갈망(渴望)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그처럼 스스로를 낮추어 보는 자기 이해를 얻게 된 것일까? 분명한 것은 성경이나 복음으로부터는 아니다. 그들은 바로 문화(文化/세속 문화든 교회 문화든) 속에서 그러한 자기 이해를 얻게 된 것이다. 전문가로서의 특권과 힘에 애착(愛着)을 갖고 있는 지도자들의 거창한 허세(虛勢)로 인해 그들은 그만 겁을 먹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영광을 포기하고 그저 가련한 소비자(消費者)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어떠한가? 소비자는 그저 수동적(受動的)인 존재일 뿐이다. <저작권자 ⓒ 경기실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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