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시니어 칼럼> 착각은 자유다

김 덕 중

장상옥 | 기사입력 2024/11/05 [21:26]

<시니어 칼럼> 착각은 자유다

김 덕 중

장상옥 | 입력 : 2024/11/05 [21:26]

 

김덕중 전 농협중앙회 지점장

 

 

 

 

  인생은 착각의 연속이다. 사람은 착각 속에 산다. 길거리에서 친구로 생각하고 앞사람 어깨를 툭 치고 무안해 한 적이 있다. 지인을 닮아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상대방에게 멋쩍고 미안하여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린다. 세상이 온통 착각투성이다. 

 

  몇 년 전 국내에서도 상영되었던 중국 44번 버스 이야기다. 실화로서 큰 울림을 주었던 영화다. 미모의 여자 운전기사가 44번 버스로 시골길을 운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운행 중에 태운 승객 3명이 깡패로 돌변해 여기사를 위협해 숲속으로 끌고 갔다. 이때 승객들은 모두 모른 채 외면하는데 한 중년 신사가 그러면 안 된다며 말렸다. 하지만, 그는 힘이 달려 깡패들에게 잔뜩 얻어맞고 상처만 입었다. 얼마 후 만신창이가 된 여기사와 흑심을 채운 깡패들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왔다. 여기사는 중년 신사를 향해 다짜고짜로 내리라고 했다. 중년 신사가 “나는 당신을 도우려고 했는데 왜 그러느냐?”고 항변했지만, 버스 기사는 “당신이 내리지 않으면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동안 침묵하며 외면하던 승객과 깡패가 합세해 중년 신사를 버스에서 내리게 하고, 짐을 차창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간신히 다른 차를 얻어 타고 가던 중년 신사는 수십 길 낭떠러지로 추락한 버스 사고 현장을 목격한다. 승객이 모두 사망한 사고 버스는 그가 강제로 내린 44번 버스였다. 여자 운전기사가 그를 욕보인 깡패들과, 불의를 보고도 외면한 승객들을 저승길 동반자로 삼고, 고마운 중년 신사만 살렸다. 죽음의 길로 함께 간 승객들은 여자 운전사가 험한 일을 당하고도 자기책임을 다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착각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그들은 중년 신사와 함께 힘을 합쳐 깡패들을 말렸어야 옳았다. 

 

  착각 속에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 되고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재미있는 착각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모임 때마다 좌중을 웃기는 동기생 P가 있다. 맛깔스러운 그의 말솜씨는 참석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자들은, 못생긴 여자는 꼬시기 쉬운 줄 안다. 여자들은, 남자가 같은 방향으로 걷게 되면 자기한테 관심이 있어서 따라온 줄 착각한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은 젊고 예쁜 여자에 관심 없는 줄 안다. 남편이 회사에서 적당히 일해도 잘리지 않고 승진하는 줄 착각한다. 남편들은, 살림하는 아내가 집에서 노는 줄 안다. 돈 버느라 고생하는 남편이 불쌍해서 아침상에 반찬 좀 신경 써 주면, 지난밤에 밤일 잘해서 잘 해주는 줄 착각한다.” 재미난 착각은 있어도 재미난 오해는 없다. 얼마 전 내게도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

 

  열대야가 한창이던 지난 8월 초 일이다. 더위에 지치고 냉방에 처진 몸에 불청객이 불쑥 나타났다. 목이 근질근질해지더니 가래 조짐이 보이고 기침이 시작되었다. 코로나19가 다시 창궐 중이라는 소식 탓인지 아내의 관심이 남달랐다. 신속히 병원을 다녀오라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찾은 곳은 최근  개원한 「녹양S내과의원」 이었다. 능수능란한 진료와 친절한 서비스 속에  주사를 맞고 약국을 거쳐 돌아왔다. 처방 약을 훑어본 아내는 “기침, 가래에 효능이 좋은 D 제약 시럽이 빠졌으니, 추가 처방을 요청하자”고 했다. 그 시럽은 1년 전 코로나로 인하여 3주 동안 내가 끙끙 앓던 시기에 효험을 준 적이 있다. 그렇더라도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 아닌가. 이미 끝난 사안인데 추가 처방이 가능하리라는 아내의 생각은 상식 밖이었다. 전문의를 능가하는 아내의 태도에 의문이 생겼다. 

 

  병원에 가기 전에 미리 알려 주었더라면 좋았을 일이다. 별 반응이 없는 내가 답답했는지, 아내는 S 내과로 전화를 걸었다. 시럽 약 추가 처방이 가능한지를 묻고, 처방전을 받기 위해 지금 출발하겠다는 요지였다. “의사 선생께 말씀드려 보겠다”는 간호사 답변에 아내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후에 돌아온 아내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마치 떫은 감을 덥석 깨물다 만, 그런 인상이었다. 그래도 손에는 시럽 봉지를 쥐고 있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아내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의사는 전문가다. 본인이 처방한 알약에는 고객이 운운한 시럽 성분이 모두 들어 있다.”는 훈계와 함께 핀잔을 잔뜩 얻어듣고 결국 허탕을 쳤다는 것이다. 단단히 망신살이 뻗친 것이다. 아내의 오만이 부른 혹독한 대가였다. 

 

  허탕 귀로에 빈손이 민망해서일까. 아내는 자신의 단골 병원에 들러 시럽 약을 처방받아 왔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복용 이틀 만에 감기 증상이 사라진 것이다. 질병과의 전투에서 초전 박살의 성과를 거뒀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2주 만에 낫고, 복용 안 하면 보름 만에 낫는다’는 속설을 완전히 깨버렸다. S 내과 처방 약과 시럽을 동시에 복용한 결과다. 시럽은 한 봉지가 아니라 두세 봉지를 한꺼번에 마셨다. 이것은 순전히 내 의지였다. 아내의 성의와 내 의지가 함께 어우러져 ‘쾌유(快癒)’라는 위대한 결실을 빚어낸 셈이다. 이쯤 되면 아내는 우리 집에서만큼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는 인재가 아닐까?

 

  실제 자신도 모르게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누군가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을 때 사람을 지켜보는 게 좀 불편할 뿐이지, 직접적인 피해를 보는 일은 거의 없다. 착각은 그저 착각에 불과할 뿐이다. 착각은 누구나 할 수 있기에 자유지만, 오해는 금물이다. 한 번쯤 엉뚱한 착각에 빠져보면 어떨까 싶다. 

  • 도배방지 이미지